안녕하세요.
저는 골프를 좋아하는 대학생=골좋대입니다.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벌써 일요일이 끝난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그리고 1월도 끝나 2월이라니 시간 정말 빠릅니다.
저도 이제 개학이 한 달쯤 남아서 준비를 조금씩 해야 되는데
또 비대면이라 준비를 할게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일요일 마무리 잘하시고 다음 주 파이팅합시다!!
오늘은
'코리안 탱크 최경주' 선수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들 '최경주' 선수가 누군지는 아시죠??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은 당연 커니와 골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인물이죠.
한국 여자 골프 전설에는 '박세리'선수가 있었다면
한국 남자 골프 전설에는 '최경주' 선수가 있을 만큼
한국 남자 골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선수입니다.
2000년대 초에 PGA 투어에서 어느 누가 한국인이
우승할 거라 생각을 했겠습니까....
'최경주' 선수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으며
지금 '임성재, 김시우, 안병훈, 배상문' 등이 PGA 투어에서 활동할 수 있게
길을 닦아 놓은 한국 남자 골프의 영웅과 같은 존재감을 보여주었죠.
그럼 지금부터 '최경주'선수의 골프 인생을 드려다 볼까요?
(고고~)
1. '최경주' 선수는 누구인가?
- 이름은 '최경주' 1970년 5월 19일에 전라남도 완도군에서 태어났습니다.
농업에서 종사하시는 부모님을 도와주며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학비를 아끼기 위해서
역도 선수를 했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어릴 적부터 역도를 해서 키는 작지만
어깨가 넓고 다부진 체형을 만들어서 외국선수들에게 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성격으로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역도 선수 생활을 했지만 자신에게는 소질이 없다는 것을 알고 중3 때 역도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 이후 완도수산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골프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처음 골프연습장에 간 날 7번 아이언으로 140M을 보내면서
그 날 손에 감긴 임팩트 느낌을 잊지 못해 골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집안이 넉넉지 못해 스스로 돈을 벌어 연습장을 다녔고, 당연히 레슨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대신 '잭 니클라우스'의 책을 보며 스스로 터득했고
해수욕장에 나가 모래사장에서 연습을 했으며, 폐타이어를 가지고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많은 노력으로 실력은 70대 타로 들어왔고, 서울에서 온 한서고 재단 이사장인 김재천 씨는
'최경주' 선수의 실력을 보고 그에게 서울 전학을 권유했고 그 또한 가고 싶어 했지만,
완도수산고등학교에서 반대로 전학에 힘듦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최경주' 선수의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들한테 양복을 한 벌씩 돌리면서
그의 전학을 허락받았다고 하네요.
서울로 전학을 오면서 성실히 골프 연습에 매진을 하면서, 대회에 출전을 했지만
우승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후 그는 군대를 빨리 갔다 와야 한다는 생각에
졸업 후 1년 있다가 군대를 갔다 옵니다.
전역한 후부터 공은 더 잘 맞기 시작했지만, 그는 바로 프로 도전이 아닌
아마추어 신분으로 그를 후원해준 고등학교를 위해 2년 동안 준비 후 대회에 나가
단체전 우승과 개인전 우승을 하고 트로피를 학교에 전달하면서
학교에 대한 감사함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이후 93년도에 프로테스트에 합격하고 그 해 겨울 시드권까지 확보하면서
본격적으로 프로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95년도에 팬텀오픈에서 첫 우승을 하고 96년, 97년도 2년 연속
상금랭킹 1위와 대상을 차지하며 그의 클래스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가 97년도에 미국에서 열린 골프 월드컵에 참가해
미국 골프장을 밝고 나서 그는 'PGA 투어'에 진출하기로 결심 후
98년도에 Q스쿨을 봤지만 떨어졌습니다.
내년을 기약하고 한국에서 대회 준비를 했지만 IMF로 인해
대회가 대부분 취소가 되면서 '최경주' 선수는 일본 투어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기린 오픈'과 '우베 고산 오픈'에서 2승을 거둡니다.
이후 디오픈에도 출전을 했지만, 아쉽게 컷 탈락을 했다고 합니다.
'최경주' 선수는 99년도에 Q스쿨을 재도전했고, 공동 35위로 합격을 하면서
2000년에 PGA 투어를 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골프를 잘 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살아남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는 첫 해에 상금랭킹 134위로 시드권을 잃었고
다시 Q스쿨을 봐야 했다고 합니다.
시드권을 다시 얻은 '최경주'는 2001년도에는 5위권 5번, 탑 10 5회로
상금랭킹 65위로 다음 해 시드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 그에게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인으로 첫, 동양인으로 3번째로
2002년 PGA 투어 뉴올리언스 콤팩 클래식에서 첫 우승을 하면서 한국 골프에
새로운 역사를 쓰면서 많은 골퍼 팬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최경주' 선수가 PGA 투어 진출할 당시 주변에서는 그의 진출은 실패일 거라
말을 했지만 그는 당당히 PGA 투어 '도전'을 해서 20년 동안 살아남아
8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늦은 나이 열약한 환경에서 시작한
'최경주' 선수를 보고
'신이 우즈를 선택했다면, 최경주는 신을 감동시켰다'라는 말도 나올 만큼
그의 클래스는 대단했습니다.
2. '최경주' 선수 시절
- 그는 KPGA투어에서 10승과 일본 투어 2승, 유러피언 투어 1승 그리고 PGA 투어
8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PGA 투어에서는 2001년 뉴올리언스 콤팩 클래식을 첫 우승과, 같은 해 템파베이 클래식에서
두 번째 우승을 거두고 2005년 그린즈버러 크라이슬러 클래식, 2006년 크라이슬러 챔피언십
2007년 메모 리언 토너먼트, 2007년 AT&T 내셔널, 2008년 하와이 소니 오픈, 2011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했습니다.
그는 한국 남자 골프의 선구자로서 '첫'이라는 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인 처음으로 PGA 투어에서 우승을 했고, 유로피언 투어에서도 우승을 했으며
2004년에는 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 토너먼트'에서 단독 3위를 하며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PGA 투어 선수라도 출전하기 어려운
'마스터스'에 출전한 것도 대단하지만 거기다 단독 3위를 한 것은 그 당시나
지금도 대단한 일이죠.
그리고 5대 메이저라 불리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하면서
한국이 아닌 아시아 최고의 선수로 불리게 됩니다.
그는 20년 이상 PGA 투어에서 활동하면서 우승상금으로 3200만 달러(한화로 310억 원)를
획득했고, 한국 선수 중 단언컨대 상금과 우승 횟수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선수생활을 하며 기뻤던 순간을 뽑으라고 하면
자신이 PGA 투어 상금랭킹 25위 안에 들은 것을 뽑기도 했습니다.
50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까지 PGA 투어에서 젊은 선수들과 겨루는데,
이번에 열린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에서 드라이버 평균 거리 258.5야드로
참가 선수 중 가장 짧지만, 드라이버 정확도는 공동 10위 아이언샷 정확도는 공동 16위를
지킬 만큼 그의 건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2020년부터 PGA 시니어 투어에도 참가하면서
도전의 아이콘답게 새로운 도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최경주' 선수의 이외의 것
- ‘최경주’ 선수는 PGA 투어에서 신장이 큰
외국 선수들이 공을 잘 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작은 키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독일 병원에 가서
키 수술까지 상담받았다고 합니다.
키 수술을 받으면 10cm까지 늘릴 수 있다고 했지만
회복을 위해 3년 동안 골프를 하지 못해
관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단국대 법대를 다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합니다.
언론에서 아내 분에 대한 많은 고마움을 표시했고,
그가 말을 잘할 수 있는 이유 또한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2012년에는 그의 골프 인생을 담은 ‘코리안 탱크’라는
책을 내면서 대중들에게 최경주 선수가 노력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더 강하게 심어주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어렸을 적 골프를 하면서
여러 사람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자리가 자신만의 힘이 아닌
여러 사람들의 힘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2007년에는 최경주 재단을 만들어 많은 꿈나무 골퍼들을 키우고, 기부 등을 하며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최경주’ 선수는 ‘잭 니클라우스’와 가까운 친분을 가지고 있는데요
‘최경주’가 ‘니클라우스’가 만든 메모리얼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뒤 ‘니클라우스’에게
‘어릴 적 당신의 책을 보며 골프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니클라우스’는 그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후 ‘니클라우스’는 ‘최경주’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를 하거나, ‘니클라우스’는 ‘최경주’ 선수의 막내딸의 고등학교 졸업을 축하하는 편지까지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남자 골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리우 데 자이네루에 참가를 했고, 이번 도쿄 올림피에서도
만장일치로 감독에 선임이 되었습니다.
'최경주' 선수는 리우 데 자이네루 올림픽에서 선수로도 출전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맞지 않아 아쉽게 출전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최경주’ 선수의 골프 인생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경주’ 선수가 PGA 투어에서
8승의 대기록과 20년 이상의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그의 마음가짐인데요.
그는 다른 어떤 것보다 ‘노력 그리고 성실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최경주’ 선수는 ‘성공의 아이콘’보다
‘노력의 아이콘’으로 보이길 원하죠.
그의 바람대로 누구나 '최경주' 선수를 '노력과 도전'의 아이콘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저도 골프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최경주' 선수의 골프도 배울 점이 많지만
그가 걸어온 골프 인생에서도 배울 점은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있을 '최경주' 선수의 골프 인생을 응원합니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좋은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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